소년의 꿈
가난한 소년의 사랑 글/은새
충남 어느 시골 북쪽엔 큰 소나무가 늘어선 작은 동산이 있고 앞쪽엔 넓은 들녘이 보이는 작은 마을 들판과 마을 사이를 가로지르는 신작로에는 드물게 구닥다리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고 달리며 해질녘이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신작로 끝을 바라보는 작은 소년이 살고 있었다.
줄곳 행상을 떠나는 엄마를 배웅하며 " 엄마 언제 와? " " 가봐야 알지! " 동구밖 끝에 멀리 사라져간 엄마를 아쉬워하며 길섶에 쪼그려앉아 훌쩍거리다 엄마... 엄마... 삭동가지가 부러지고 또 부러지게 그리움이 낙서를 한다.
말이 없는 아이, 인사를 잘하는 아이, 사람들은 말을 하지만 낯선 동네 남의 집 사랑채를 빌려 사는 소년의 눈가에는 모두가 버거운 존재였다. 한 낮엔 뻐꾸기가 울고 해질무렵이면 엄마를 찾아 달려가는 아이들을 보며 소년은 몇날이 가도록 엄마를 기다려야만 했고 아이들이 소풍을 가는 날이면 주인집 소를 끌고 뒷산에 올라 낡은 소설책을 뒤척이며 이해 할수 없는 말들을 되새기곤 했다.
몹시 추운 겨울이 가고 뻐꾸기가 울어대던 계절이 몇 번 바뀌고 어느덧 소년의 모습도 거뭇거뭇 영글어가고 있었다. " 섭아! 빨리 와! 시작한다! " 라디오 연속극 시작을 알리는 소리 주인집 홀할머니 외손녀인 네 살 터울 누나가 부르는 소리, 종일 고대하며 기다리던 시간 달빛이 마당을 지나 마루를 타고 오를 때 담장 밑 화단에 핀 하얀 백합꽃의 향기가 온밤을 가득 메운다. 달빛에 비추어진 누나의 뽀얀 무릅에서도 백합꽃 향기가 난다.
누나는 시골읍에 여상고 3년생, 수일 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텅빈집이 무서운 밤이 되면 나를 부르곤 한다. 어느 날 누나의 친구들이 왔을 땐 나를 불러놓고 " 내동생 잘 생겼지? " 너스레를 떨면 나는 부끄러워 빨개진 얼굴로 도망치듯 숨어버리곤 했다. 또 한날은 빨래를 걷으며 브레지어를 들고 "이게 뭐게?" 엉겁결에 나는 "젖 뚜껑!" 하고 크게 웃는 누나의 웃음 소리에 민망해 고개를 떨구던 나 할머니가 운명하신 날 영전에서 서럽게 우는 누나를 보며 담모퉁이에 서서 덩달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연속극이 끝나고 달빛이 마루끝에 사라져갈 때 할머니의 영상이 무서워 혼자 잘수 없는 누나의 밤을 나는 지켜줘야 했다. 누나의 발밑에 누워 잠을 청하는 나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라 이유없이 온몸이 굳어가고 있었다. 까까머리 둘레에선 송글송글 땀이 맺히고 침을 삼킬 수도 숨을 크게 쉴 수도 없었다. 행여나 누나의 발끝이 닿을까봐 바짝 벽을 향해 웅크린채 긴 적막이 흐르고 겨우 잠이 들 즈음 새벽닭이 울고 나는 황급히 방을 나와 새벽공기의 해방감에 큰 기지개를 켜며 곤혹스럽게 잠들어 있는 방을 쳐다본다.
내 생애 맨처음 아픈 이별의 시간, 누나가 고속버스 안내원 취업이 되어 부산으로 떠나는 날 " 월급타면 사전하고 단어집 사서 보낼께 공부 열심히 해? " " 언제나 땅만 보고 걷지말고 가슴펴고..." 가난은 네 잘못이 아니고 지나가는 거라고 " 힘들거나 외로울 땐 편지하고..." 부산 범일동... 주소가 적힌 종이를 접어 교복 주머니에 넣어주며 울먹이는 목소리 말을 잊지 못하고 돌아서 대문을 나서는 누나에게 한마디 인사도 못한채 오늘이 끝나면 내일이 없을 것 같은 공허감이 밀려온다.
하교길 장마에 개울물이 넘칠땐 누나를 업고 자갈에 미끌어져 물속에 뒹굴며 키득거리던 기억들 물김치에 밥을 비벼 " 배고프지? 많이 먹어! 감자도 먹고..." " 교복단추 잘 채우고 모자 똑바로 쓰고..." 때로는 나무라고 때로는 격려하며 내곁을 지켜주던 사람
누나는 기차역을 향해가고 있었고 걸음을 채촉해가는 누나의 뒤에 한참 거리를 두고 나는 등교길 같은 방향을 가고 있었다. 높은 구두에 짧은 원피스 아침 햇살 역광에 누나의 뒷모습은 신비로운 여명과 같았다. 시골 아침의 풋풋한 바람에 그날 밤 백합꽃의 향기가 풍겨온다. 그 진한 향기에 눈물이 보일 것 같아 나는 가까이 갈수가 없었다. 멀리서 대합실로 들어가는 누나의 마지막 모습을 가슴에 담고 기적소리와 함께 멀어져가는 열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소년은 수업중에도 창밖에 멀리 보이는 기차역을 줄곳 쳐다보며 하교길에는 텅빈 시골역 플랫폼에 서 있었다. 기차가 떠난 자리에도 하얀 백합꽃의 향기는 풍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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